<폼폼/랜드>의 미끄럼틀: 육지와 바다 사이를 타고
콘노 유키 (미술비평)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i)가 설계를 맡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나 파리의 (얼마 전에 일부가 불에 타버린 후, 지금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다른 건축물과 비교해서 필자의 관심을 끄는 부분은, 거대한 비계(아시바)나 크레인에 의해 외부에서 주어지는 힘을 받아서 겨우 서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원래 비계는 건축물 그 자체는 아니며 건물이 완성되면 제거된다. 두 건축물을 보면 비계가 건축물과 어울려서 보이는데,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정신적 힘으로 우뚝 서는 것과 달리, 외부에 마련된 장치들의 도움과 간섭을 받으면서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한편 두 건축물에서 관심이 가는 (말 그대로) ‘부분’은 바로 바깥에 있는 그 장치들이 건축물의 ‘일부분’으로 통합되어 건축물 자체로 인식되는 점이다. 이때 비계는 건축물과 구분되는 외부가 아니라 이미 전체의 일부분이다. 건축물을 외부에서 건축물의 일부분이 되는 구조물은 건축물의 자율성을 살짝 건드린다. 즉 자율성과 외부의 간섭, 전체와 (일)부분의 두 영역은 각각 전자를 향해 미끄러져 통합된다.  

이번 박영진의 개인전 <폼폼/랜드>를 분석할 때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어떤 건축물의 모형을 이차원적 설계도에 기반하여 만든 다음, 그 모양을 왁스 덩어리에 뜬 결과물을 보여준다. 건축물이 서 있는 모습은 볼 수 없고 화산 분화구처럼 가운데가 보이드(void)의 상태로 비어 있는데, 그 모양은 대부분은 기하학적이거나 여러 모양의 조합으로 나온다. 이는 외부에서 힘을 주어 안의 형태를 만드는 거푸집의 논리를 역전시켜, 안에 모형을 넣음으로써 ‘외부에 대한’ 거푸집을 만들어준다. 그런데 작품을 볼 때, 지하실의 모습을 구체화했다거나 ‘비어 있음의 가득 차 있음’ 혹은 ‘외부가 내부가 되고 외부가 내부가 되는’ 식으로 단순히 해석할 수 없다. 그 대신 여기서는 ‘바다와 육지의 영역 표시’라는 표현을 쓰면서 작품을 분석하고자 한다.

작품을 보면 모형인 건축물이 있던 자리는 구멍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보이드의 벽이 되는 위치는 언덕처럼 생긴 외부가 무너지지 않기에 건축물 모양을 세우고 있다. 이 역-거푸집으로 만든 외부가 무너지면 그곳(보이드)은 건축물이 아니라 땅이 되어 들어선다. 이처럼 작업에서 벽면이 만약 무너질 때 내부는 외부가 되어, 앞서 언급한 노트르담과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건축물에서 나타난 비계와 건축물의 관계처럼 통합되는 관계가 된다. 따라서 작업에서 무너지지 않고 있는 벽은 외부와 내부의 동어반복적인 관계가 아니라 외부와 내부를 벽으로 연결하는 긴장관계를 보여준다. 이 관계를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 ‘바다와 육지의 영역표시’이다. 바다는 육지(land)와 엄밀히 말해 다르지만, 정확한 위치 구분을 할 수 없다. 예컨대 썰물 때와 밀물 때에 바다와 육지가 점유하는 영역이 달라진다. 바닷물이 차오른 곳은 바다가 되는데, 그때 육지는 사실상 바닷물에 잠겼을 뿐 바다와 완벽하게 절단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물높이에 따라 두 구분이 점유하는 영역이 달라지면서도 사실상 땅덩어리의 존재 때문에 상호침투하는 것처럼, 작가는 외부가 되거나 내부가 될 수도 있는 긴장관계의 벽을 작품에 세우고 있다.

이때 긴장관계는 공간적으로 두 요소를 분리하면서도 연결시킬 뿐만 아니라, 영역 간의 속성의 차이를 구분하면서도 연결시킨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나무로 제작된 그리드 위에 유리판 혹은 유리판으로 만든 박스를 놓고, 그 위에 건축물의 공백이 들어간 왁스 덩어리를 놓는다. 관람객들은 전시장에서 ‘입체’작업을 보는데, 조감도로 된 설계도에 근거하여 제작된 작업은 관람객이 위에서 내려다보게 될 때 다시 ‘평면’으로 인식된다. 왁스 덩어리에 생긴 공백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네모나 마름모꼴과 같은 기하학적 모양으로 보이며, 동시에 보이드의 깊이감, 유리판과 유리판으로 된 박스, 그리고 나무로 제작된 그리드까지 모두 모눈종이 위에 그려진 평면 이미지로 (다시) 인식된다. 일반적인 조감도식의 설계도를 보면 땅과 건축물은 선으로 구분되어 각 영역을 나누고 있지만, 실제로는 벽이라는 하나의 선-면으로 땅/평면과 건축물/입체는 연결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전시장 안에서 작업이 평면으로 보이는 시점과 입체로 보이는 시점은 세워진 유리판, 역-거푸집, 그리고 전시공간 안에 만든 작은 전시공간을 보이드로 세우는 가상의 벽으로 연결시켜준다.

분리되는 공간과 분류되는 속성을 연결시켜주는 벽 혹은 바다와 육지 사이의 땅덩어리의 관계는, A4용지에 출력한 미니멀한 도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시공간에서 배포되는 도면은 일반적으로 위에서 보는 조감도로 그려지면서 평면으로 옮겨져 평면적인 공간이 된다. 사실 이번 전시에서 도면을 제대로 보고 이해하려면 수직으로 보는 것이 맞다. 전시공간 바닥에 작업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도면을 가지고 수평으로, 마치 벽에 걸린 페인팅을 보듯이 가상의 전시공간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종이를 세워서 도면과 마주 보면, 3층짜리 건물에 1층은 비어 있고 2층과 3층에 각각 작품이 세 개씩 있다. 1번 작업(<무제(계단)>)은 좌대가 되고, 그 위층에서 7번 작업(<폼>)은 좌대가 아닌 작품자체가 된다. 전시장뿐만 아니라 도면, 그리고 도면을 보는 방법을 통해 수평과 수직, 평면과 입체, 그리고 작품의 외부요소인 지지체/좌대와 작품의 관계를 영역화하면서 선-면으로 연결시킨다.

여기서 선-면은 연결의 의미에서 비스듬하게 세워진,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건축물 <빌라 사보아> 내부에 있는 램프(ramp)와 같은 경사의 속성을 보유한다. 공간을 평면적으로 연결하는 램프는, 마치 육지와 바다 사이에 있는 땅덩어리가 그렇듯이 구분 지어진 경계 사이에서 서로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옆에서 보면 선으로 보이는 경사는 미끄럼틀이 그렇듯이 타고 내려갈 때는 면으로 인식된다. 시선이 수평 혹은 수직이냐에 따라 작품은 평면으로 통합되거나 입체물로 서게 된다. 이번 전시는 그런 의미에서 공간에 대한 동어반복도 공백의/가득 차 있음과 같은 ‘생각의 전환(혹은 맞바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 사이에 서는 벽 자체가 이미 평면적 속성과 입체물을 만들고 지탱시키는 속성 둘 다 내포하며 작품과 도면을 통해 두 가지(평면적 시각과 입체적 시각) 영역 사이의 긴장관계를 전시에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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